2013年10月20日日曜日

픽션 1

"아저씨, 나한테 할 말 있죠?"
두 서너 역 전부터 맞은 편에 앉았던 여고생이 마침 나의 옆자리가 비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벌떡 일어서더니 순식간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으며 말을 건넨다. 나는 이 예상치못한 전개에 무척 놀랐지만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도 나는 그렇게 민첩하지도 않고 지금은 그럴 기운도 없다.
"나는 다 알아요. 말해봐요."
정체가 무엇일까. 이건 일종의 테스트인가. 나는 머리를 빠르게 회전시켰다. 말로만 들었던 감시자일까. 아니면 정말 나의 정체를 알아본 것일까....어느 쪽이 더 내게 안전한지조차 나는 판단이 서지 않는다.
"알았어요. 말하면 안되는 규칙같은 거라도 있나보죠? 그럼 대답하지 말아요. 하지만 그냥 보내진 않을꺼예요. 미래에서 온 아저씨."
분명, 나의 눈동자가 흔들렸을 것이다. 누가 봐도 나는 동요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나는 건너편에 앉은 내가, 그러니까 건너편에 앉은 내가 벌써 세 시간째 미행하고 있는 젊은 내가 그 소릴 들었는지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미.래.에.서.온.아저씨라니...

다행히도 나는, 그러니까 내 건너편에 앉아 자기 무릎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나는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가만...내 인생에 오늘같은 날이 있었던가. 알 수가 없다. 2013년의 특정할 수 없는 어느 날에 나는 통학 전철에서 미래의 내가 정체불명의 여고생에게 불시의 공격을 당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었던가. 그럴 리가 없다. 그런 일이 있었다면 나는 오늘을 특정할 수 있었을 것이다. 생각이 정리되자 나는 비로소 옆에 앉은 여고생을 쳐다보았다. 모르는 얼굴이다. 미르의 충고는 옳았다. 나는 다행히도 입꼬리를 가릴만큼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아빠는 입꼬리가 문제야. 감정이 다 들어난다니까. 엄마도 그랬어. 아빠는 거짓말을 못하는게 아니라 뭘 말해도 거짓말같다고. " 정말 그렇게 말했다. "당신이 하는 말은 다 옳아. 하지만 나를 가장 화나게 하는 게 바로 그 점이지" 라고...

"학생, 무슨 소릴 하는거야"
"어, 아저씨 말 하시네요. 아저씨 미래에서 온 거 맞죠?" 이번엔 누가 들으면 큰일이지라는 표정으로 속삭이는 말투다. 되려 주목을 끌기에 딱 좋겠구만. 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저 나이의 여학생이 지하철에서 모르는 아저씨에게 이런 소릴할 정도가 되려면 어느정도의 확신을 가졌다는 뜻일까. 스스로에게 그렇게 물어보면서 나도 확신이 들었다.
"감시자인가?"

순간 얼어붙은 여학생의 표정이 보였다.나의 순순한 인정에 놀란 것인지, 자신의 정체를 들킨 것에 대한 당혹감인지는 알 수가 없다. 어쨌든 그녀가 감시자가 맞다면 아마도 메뉴얼에 없는 나의 반응에 당황을 한 것이리라.

그 때였다. 맞은 편에 앉았던 내가, 그러니까 쓸데없이 큰 가방에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미쳐 정하지 못해 이것저것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담아 들고다니는 젊은 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같이 일어서버린 나를 의식하는 일 없이 그대로 획 돌아서서는 출입문 앞에 서는 것이 아닌가.
왜 내리지?

"나는 내린다." 라고 무심코 내뱉은 말과는 반대로 나는 다시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내가 벌떡 일어난 것을 수상하게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수상한 것은 내 옆의 여고생이다. 내가 갑자기 일어선 것은 저 여고생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것으로 비춰졌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차라리 화내는 연기라도 하고 따라나설까.사실 나는 벌써 백가지도 넘는 규칙위반을 하고 있다. 어차피 중징계는 피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일반인에게 의심을 사는 행동만큼은 피해야 한다....지금 말없이 일어서서 내리는 것은 괜찮나...아..내 자신이 한심해서 참을 수가 없다. 벌떡 일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 다시 앉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최소한 "나는 내린다"따위의 독백만은....누군가 지금의 나를 의심이라도 하는 날이면 나는 영원히 이 시간축으로는 얼씬도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더더욱...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나는 나를, 그러니까 바로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 젊은 나를 따라 나서기로 했다. 내 기억이 맞다면, 그리고 내가 제대로 된 시공간에 와 있는 것이라면 저 앞에 선 나는 나를 만나지 않았다. 그러니 나는 지금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셈이다. 나는 과거에 개입해 나 자신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려고 하고 있다. 감시자는...감시자는? 감시자는 어느새 보이지 않는다. 소문으로 듣기에 그들은 실재로 그 시대에 태어나 사는 이들이라고 했다.그러니 내가 그녀를 만난 것이 우연이 아니라면-아니 우연일 리가 없지-그녀는 오늘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 이 시간축에 심어진 프로그램인 셈이다. 그러니 그녀에게는, 스스로를 증명할 길이 없는 나를 궁지에 몰아넣는 일은 식은 죽 먹기 일 것이다. 그냥 저 자리에서 비명만 질러도 나는 실패하겠지. 그나저나 감시자가 여성이었다니...이 얘길 해주면 미르가 배를 잡고 웃겠군. 나는 마치 실패를 인정이라도 한 듯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잡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 중요한 순간에.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집중하자.

"저....이봐. 성진군"
나는 전철을 내려 지상으로 가는 에스컬레이터에 올라선 나에게, 그러니까 쌀쌀해진 가을 날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름바지에 남방하나를 입고 특별한 볼 일도 없으면서 습관적으로 긴자역에 내려선 나를 불러세웠다. 이곳의 에스컬레이터에서라면 적어도 40초동안은 그를 잡아 둘 수 있을 터...
"누구....저...저를 아시네요?"
나는 나의 기억보다도 밝은 톤으로 대답하는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내가 아는 내가 이런 상황에서 저렇게 의연하게 행동하는 타입이었던가? 일본의 도심한복판에서 한국말로, 그것도 내 이름을 정확히 알고 있는 처음보는 연상의 남자에게?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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